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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해군묘(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56). 130409.
-임해군[臨海君, 선조 7년(1574)∼광해군(1609)], 초명은 진국(鎭國), 뒤에 진(珒)으로 개명, 시호는 정민(貞愍), 본관은 전주(全州),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서자, 어머니는 사도시첨정 김희철(金希哲)의 따님 김해김씨이다.
서자이지만 서열이 첫째이므로 당연히 세자가 되어야 하나 아우인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기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명에 의하여 순화군(順和君)과 함께 김귀영(金貴榮)·윤탁연(尹卓然) 등을 대동하고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함경도로 떠났다. 그해 9월 반적 국경인(鞠景仁) 등에 의하여 포로가 되어 왜장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넘겨져 고원(高原)에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여러 차례 석방협상 끝에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임해군은 포로가 되었던 정신적인 압박으로 인하여 그 포악하기도 하였지만 한편, 왜장 가토하고 포로로 있을 때의 친분을 기화로 여러 차례 그에게 서신을 보내서 내정을 탐사하려고 하였다.
그 뒤 1603년 사옹원도제조가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세자 봉작에 대한 서열문제가 명나라에서 다시 거론되어 현장실사를 위하여 사신이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일부 대신들의 주청에 의하여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강화의 교동으로 이배되었고, 이듬해 죽음을 당하였다. 인조 1년(1623)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등극하자 복작 신원되었다 한다.
*강화에 유배 중 명나라 사신을 만나고 궁궐에서 곧 불러들일 것이니 보약이나 먹으라고 준 약이 사약일 줄이야, 피를 토하며 광해군을 부르며 죽었다는 임해군 수원 광교산에 묻혔다 이 곳으로 이장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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