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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으로] 전남 고흥 섬 나들이 - 시호도, 소록도, 거금도, 우도

나무향(그린) 2014. 12. 25. 07:44

 

  ▲▼  전남 고흥군 덕흥리 구룡마을 앞 선착장에서 시호도 입도하는데, 거리는 선박으로 2~3분 소요 된다.

 ▲ 무인도인 원시의 섬 시호도 가는 뱃길. 육지에서 직선거리로 300m라 했다.

 ▲ 전남 고흥군 시호도(尸虎島)

 시호도란 이름은 위 안내도의 그림같이 하늘에서 바라본 시호도의 지형이 호랑이가 죽어 누워있는 모양과 같다하여 시호도라 불리고 있다 한다.

 

호랑이가 살아있는 모양이면 사람에게 해가 되는데, 죽은 모양이라 사람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구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한다.

이곳은 복잡한 문명을 잠시나마 잊고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원시인들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원시체험 마을이 조성되어 있으며, 바다에서 즐기는 갯벌체험과 함게 섬을 탐방할 수 있는 솔바람 길 등 산책로가 있어 다양한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 원시체험을 해볼 수 있는 무인도인 시호도. 전남 고흥군 내나로도에 있는 시호도란 섬에 입도 했다.

 

 ▲ 시호도 체험장인 움막 9동이다. 고흥군에서 운영하는 무인도 원시체험장은 이곳이 처음이라 한다.

 ▲ 움막 내부. 숙박, 메트 침낭 베게 등을 제공한다고 한다.

▲ 이곳 시호도에서는 복잡한 문명을 잠시나마 잊고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원시인들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원시체험 마을이 조성되어 있으며, 바다에서 즐기는 갯벌체험과 함께 조개채취, 활쏘기 등, 섬을 탐방할 수 있는 솔바람 길 산책로가 있어 다양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 모닥불 피워 놓고, 석화구이를 했다.

 ▲ 시호도에서 바라 본 구룡마을이다.

 

 

 ▲ 고흥 발포만호진성, 전라남도 기념물 제27호로 지정 되어 있다.

 

발포만호성은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성촌마을을 중심으로 있는 성으로, 만호(萬戶)란 조선시대 때 각 도의 여러 진(鎭)에 파견된 종 4품의 무관직을 말한다. 적의 침입을 막고자 해안선을 따라 성을 쌓았는데 그 모양이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다.

'성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발포만호는 조선 성종 21년(1490)에 쌓은 것으로, 둘레 1350척, 높이 13척이라 한다. 현재 성의 둘레는 560m, 높이는 4m이고, 서벽이 동벽보다 깊다. 동서남북 4벽이 거의 남아 있으나 동벽과 남벽은 민가의 담으로 이용되고 있다. 성 안에는 동헌과 객사 등의 관아 건물터가 남아있고, 배수로와 무기고의 터도 남아있다. 또 동문, 서문, 남문, 망루터도 확인된다고 한다.

  ▲ 전남 고흥 충무사 - 이순신장군 사당이다. 전남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 607

 

 고흥 충무사는 선조13년(1580) 7월 이순신 장군이 36세 때 수군의 직책으로는 처음으로 발포만호로 부임하여 선조 15년(1582) 1월까지 모함을 받아 파면되기까지 18개월간 재임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었다 한다. 영정을 모신 사당(13평)을 비롯하여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다. 이곳에는 이곳 충무공 보전위원회 주관으로 매년 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에 충무공 탄신제를 거행하고 있다 한다.

 ▲ 이 충무공 머무시던 곳(지은이: 노산 이은상 선생)

 ▲▼ 고흥 발포역사전시체험관으로 이동했다.

 

 

 

 

▲ 141220 ▼ 141221

 

 ▲ 고흥쌍충사 (전남도 기념물 제128호) 충열공 이대원(1566∼1587)과 충장공 정운(1543∼1592)을 모신 사당이다.

이대원은 선조 20년(1587) 녹도만호가 되어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대파하였고, 다시 흥양에 왜구가 침입하자 맞써 싸우다가 손죽도 해상에서 순절하였다. 이에 선조는 사당을 지어 모시게 했는데 이것이 쌍충사의 전신이다.

정운은 선조 24년(1591) 녹도만호로 부임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과 함께 목포·당포·한산해전 등에서 용감히 싸우다 부산 몰운대에서 순절하였다. 선조 25년(1592) 이순신 장군의 청으로 이대원과 함께 사당에 모시게 되었다 한다.

정유재란으로 불타 버린 것을 숙종 7년(1681) 새로 짓고, 2년 뒤 쌍충사로 사액되었다 한다. 영조 11년(1735)에 보수하였고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22년 고흥향교 선비들이 다시 지었다고 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42년 일본인들이 폐허로 만든 것을 1957년 다시 고쳐 지은 것이라 한다.

 

 ▲ 어판장에서는...막 건져 올려진 광어 경매중이었다.

▲ 녹동항 앞에서 아침식사

 

▲ 일제 강점기 강제 수용된 한센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인권 유린의 현장. 고흥 소록도에 들어선다.

  전라도 길

   ― 소록도로 가는 길에 / 한하운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고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작업화)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 해방은 또 다른 갈등이었다. 많은 한센인이 병원 운영을 둘러싼 행정직과 의사의 갈등 속에서, 치안대는 협상을 위해 나온 원생대표들을 모두 살해하고 모래구덩이에 송탄유를 붓고 불태워 묻었다 한다. 그후 56년 만인 2001년 유골 작업을 거쳐 그 자리에 한센가족의 이해와 온전한 인권회복을 위한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한다. 이 사고로 원생대표 90명중 84명이 죽었다 한다.

 

목숨 / 한하운

쓰레기통과
쓰레기통과 나란히 앉아서
밤을 세운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죽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아직도 살아 있는 목숨이 꿈틀 만져진다.

배꼽 아래 손을 넣으면
37도의 체온이
한 마리의 썩어가는 생선처럼 뭉클 쥐어진다.

아 하나밖에 없는
나에게 나의 목숨은
아직도 하늘에 별처럼 또렸한 것이냐.

 손가락 한 마디 / 한하운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 마디 살 한 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둔다.

 

날이 따스해지면

남산 어느 양지터를 가려서

깊이 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

▲ 고흥 구 소록도갱생원 검시실(등록문화재 제66호). 1934년 건립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한센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정관 수술과 시체 해부를 했던 곳으로 소록도의 인권 유린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사망자는 가족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우선 검시 절차를 마친 뒤에야 장례식을 거행할 수 있었고 시신은 구북리 뒤편의 바닷가에 있는 화장터에서 화장되었다.

↓↓건물 내부에 수술대와 검시대 그리고 세척 시설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 고흥 구 소록도갱생원 감금실 (등록문화재 제67호) 1935년 건립.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한센병 환자를 불법적으로 감금했던 장소이다. 남과 북에 각각 1동의 건물을 나란히 짓고 두 건물 사이를 회랑으로 연결하여 외관상 ‘H’자형 평면을 이루며, 붉은 벽돌로 높은 담을 쌓아 밖에서 볼 때 마치 작은 교도소처럼 느끼게 한다. 일제 강점기 소록도에 강제 수용된 한센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인권 유린의 현장이다.

▲ 손가락이 없어 손목에 고무줄로 감고 스픈과 포크를 끼워서 사용했다고 한다.

 ▲  보리피리/한하운시인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ㅡ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ㅡ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還)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ㅡ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ㅡ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했던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슬픔이 보리밭 이랑이랑 출렁인다.

▲ 사슴처럼 맑은 영혼을 가진 섬. 소록도 중앙공원의 빼어난 조경으로 유명하다.

▲ 소록도 성당

▲ 노란지붕 건물이 소록도 환자들 병동이라 한다.

  ▲▼ 소록도 중앙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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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사진

챔피언 벨트 

앙드레김 디자인 가운 

 

 

 

 ▲ 전남 고흥 거금도

 

박정희 대통령은 어느날 내게 소원이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 고향에 전기나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김일의 고향 거금도에 전기공사가 시작됐고 호롱불 대신 백열등을 켤 수 있게 됐다 한다.

 

 

 

▲ 거금대교

2002년 12월에 착공하여 2011년 12월 16일에 완공하였다 한다. 총 연장 2028m이며, 우리나라 처음으로 자전거와 보행자 도로와 차도를 구분한 복층 교량으로 만들어졌다.

 

 ▲ 반은 육지 반은 섬?  연인과 가족의 섬이라 불리는 고흥 남양면 우도에는 모세의 기적이 하루에 두번이나 있어 걸어서 들어가 봤다.

 

 

 ▲ 우도에는 민박은 있지만, 편의점이나 식당은 없다 한다.

 ▲ 전라도 경상도의 남부지방에서 볼 수 있는 '멀구슬나무'

 

 

 

-전남 고흥의 우도(牛島). 소머리를 닮은 암석이 있어 우도라고 붙여졌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대나무를 꺾어 만든 화살을 나라에 바쳤다고 해서 우죽도(牛竹島)라 불렸다고도 한다.

 

모세의 기적....우도로 통하는 물길은 하루에 두 번 열린다.

섬과 육지 사이를 갈라놓고 있던 바닷물이 빠지는 시간이면 광활한 갯벌이 드러난다. 갯벌 한 가운데에는 길고 좁은 콘크리트길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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