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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신륵사 - 경기 여주 봉미산

나무향(그린) 2014. 12. 19. 09:03

 

 

 

 

▲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옆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6각의 정자다.

그 전에 지어진 것은 1972년의 홍수로 떠내려가고, 그 뒤 삼층석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한다.

누각의 이름인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인데, 그를 추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이라 한다.

▲▼ 국내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전탑인 보물 제226호의 다층전탑(多層塼塔).

 

▲▼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운 연유를 기록한 보물 제230호의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 구룡루는 1689년(숙종 15)과 1749년(영조 25), 1860년(철종 11)에 각각 중수된 기록이 있다 한다.

 

▲ 금당(金堂)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1797년(정조 21)에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라 한다.

 ↓ 극락보전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삼존불(보물 제1791호)을 봉안하였고

900년에 그린 후불탱화·신중탱화·감로탱화와 1908년에 조성한 지장탱화가 있다.

 

▲▼ 보물 제225호로 지정된 대리석재의 다층석탑.

 

▲ 600년 된 향나무 보호수

▲ 141215일 현재 조사당은 공사중이었다. ▼ 조사당 사진은 11년 3월 사진이다.

 

▲ 보물 제180호로 지정된 조사당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중앙에 나옹, 좌우에 지공(指空)과 무학(無學)의 영정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 둥근 탑신을 가진 부도는 근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8각 탑신을 가진 부도는 고려시대의 부도형식에서 퇴화된 여말선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이전할 때 사리함이 발견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한다.

 

▲ 경내의 서쪽 언덕에는 부도 2기가 있다.

삼층석탑은 나옹을 화장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탑이고

부도는 원래 조사당 뒤쪽에 있던 것을 1966년 11월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나 누구의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 1379년 나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보물 제229호의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 고려 말기의 대표적 부도양식을 띤 보물 제228호의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  비천(飛天)과 용이 새겨져 그 형태가 매우 아름다운 보물 제231호의 석등.

▲ 정면 3칸의 맞배집인 명부전이다.

▼ 명부전 내부에는 목조지장삼존(木造地藏三尊)을 비롯하여 시왕상(十王像)과 판관(判官) 등 총 29구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 1773년(영조 49)에 주조한, 여주 신륵사 건륭삼십팔년명 동종(유형문화재 제277호).

▲ 신륵사 문화재 지킴이 강쥐들

 

△ [사찰] 신륵사 - 경기 여주 봉미산. 141215.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절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미륵(彌勒)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절이름을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다층전탑이 있는데, 이 탑 전체를 벽돌[塼]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절이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入寂)하였기 때문이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龍)이 호상(護喪: 초상 치르는 모든 일을 주장하여 보살피는 것)을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3개월 뒤인 1376년(우왕 2) 8월 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함께 이루어졌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으로 이 절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영릉(英陵 : 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성종 3)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다 한다.

 

그 뒤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되었다.  그 후 1671년(현종 12)에 중건하였고, 1700년(숙종 26)에 삼존상을 중수했으며, 이어서 1702년에도 중수하였다 한다. 1726년(영조 2)에는 전탑을 중수했는데, 당시에 세웠던 비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