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충만 - (29) 시간과 건강에 감사를
1
며칠 전 샌프란시스코의 한 병원에 들렀을 때, 거기서 본 광경이 하도 충격적인 것이어서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콩코드 쪽에 있는 주 정부에서 운영하는 병원인데, 노쇠해서 기둥이 부자유한 노인들만을 입원 치료하는 곳이었다. 입원 치료라고 말은 했지만, 그대의 내 느낌으로는 죽음의 문전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병든 노인들의 수용소 같았다.
입원실마다 침대가 서너 개씩 들어 있었는데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므로 거의가 누워 있었다. 물론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마침 식사 시간이어서 간호사들이 음식을 가져와 침대 곁에서 떠먹여주고 있었다. 어떤 할머니는 거의 해골이 되다시피 한 움푹 팬 눈에 미음 같은 유동식을 떠넣어주어도 제대로 삼키지를 못하고 반은 흘렀다.
뇌일혈로 쓰러져 반신불수에다 언어 장애까지 겹쳐 입원한 지 6년이 된다는 한 할머니는, 찾아간 친지들을 보고 반가워하며 뭐라 자꾸 말을 하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쪽 손과 다리를 연방 떨면서 의사 표시를 하려고 애스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그 방에 비어 닜는 한 침대는 얼마전에 죽어 나간 사람의 빈자리라고 했다.
한쪽 방에서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큰 소리로 계속 뭐라고 외쳐대는 노인이 있었다. 더러는 노망기가 들어 그런다고 했다. 복도에서 마주친 한 할아버지는 아랫도리를 발가벗은 채 비실비실 지팡이에 기대어 걸음마를 하였다. 가족 면회도 거의 없이 병든 여생을 막막하게 지내고들 있는 것 같았다.
이 병원 문을 나서면 새삼스럽게도 생로병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치고 늙지 않는 삶이 어디있으며, 병들거나 죽지 않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던가. <진리의 말씀>에서 불타 석가모니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보라, 꾸며놓은 이 몸뚱아리를
육신은 합성된 상처덩어리
병치레 끊일 새 없고 욕망에 타오르고
견고하지도 영원하지도 못할 꺼풀.
이 몸은 늙어서 시들고
터지기 쉬운 질병 주머니
썩은 육신은 마디마디 흩어지고
삶은 반드시 죽음으로 끝난다.
목숨이 다해 정신 떠나면
가을 들녘에 버려진 표주박
살은 썩고, 흰 뼈다귀만 뒹굴 텐데
무엇을 기뻐할 것인가.
뼈로써 성곽을 이루고
살과 피로 포장이 되었다
그 안에 늙음과 죽음
오만과 거짓이 도사리고 있다.
2
사람은 시간과 건강이 주어졌을 때 잘 살아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건강에 우선 고마워할 줄을 알아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시간의 여유와 건강이 모자라 인생의 꽃과 열매를 펴보지도 거두지도 못한 채 사라져갔을 것이다.
막막한 병실에 갇혀 신음하면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그들에게 다시 시간과 건강이 주어진다면 그들은 되찾은 인생을 과연 어떻게 살가? 우리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오늘 우리처럼 무자각 상태에서 살지는 않을 것이다. 모처럼 주어진 시간과 건강을 금쪽같이 아끼면서 보다 값있고 모람 있게 쓸 것이다. 이토록 소중하고 귀한 시간과 건강을 무의미하게 함부로 탕진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주어진 이 시간과 건강을 제대로 쓸 줄 모른다면, 인생에 큰 빚을 남기겠다는 생각이 병원을 다녀온 후에도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 다녔다.
흔히 듣는 말로, 동양의 노인들에 비해서 서양의 노인들이 보기에 훨씬 볼품없고 비참하다고들 한다. 물론 동양 사람들의 편견에서 나온 말일 터이지만, 늙으면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볼품없고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굳이 동서양의 차이를 가린다면, 동양은 전통적으로 유교적인 가족 윤리가 보편화되어 노부모를 집안에 모시는 것이 자식된 도리로 되어 있다. 요즘에는 서양의 개인주의 물이 들어 따로 떨어져 서로가 자유롭게 지내려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전통적인 미풍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개인주의적인 사고의 풍습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철저한 독립심과 분산주의다. 이런 현상이 우리 동양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아주 비정하고 불효막심하고 후레자식들로 비칠 수 있다.
쭈글쭈글 늙을 대로 늙어 제대로 운신도 못하는 노인들이 벤치에 쓸쓸히 홀로 앉아 있는 걸 대하면 보는 마음도 우울해진다. 우리네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귀여운 손자들과 어울려 있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물론 개인적인 차이는 있지만 아직은 보편적인 경향이다.
서양 사람들은 육식을 주로 하기 때문에 그런지, 마주치면 다시 한 번 뒤돌아볼 만큼 어마어마하게 비만한 사람들이 많다. 동양 사람들과는 달리, 나이 좀 들면 피부가 볼품이 없다. 먹는 음식으로 인해 성격과 체질은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다. 채식문화와 육식문화는 분명히 다르다.
3
육식문화는 동적이고 이기적이고 때로는 포악하다. 짐승의 고기를 삭이려면 노상 흔들거리고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자연 활동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농경과는 달리 사냥이나 도살 자체가 잔인하고 포악한 자체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5번 고속도로 중간 지점에 콜링가라는 마을이 있다. 그 지점을 지나가면 갑자기 역겨운 냄새가 달리는 차 안에가지 스며든다. 웬일인가 싶어 창밖을 내다보면 수십만 마리의 소떼들이 도살장에서 자기 죽을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광경이 눈에 뛴다. 소고기 없이는 밥을 못 먹는 사람들을 위해 무고한 목숨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도살을 당하고 있는 현장이다.
이런 데서 도살한 쇠고기들이 남아돌아 우리나라에까지 들여다 먹지 않으면 재미없다고 압력을 가하는 육식문화.
그러나 이제는 서양 사람들도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채식 쪽으로 기울고 있다. 서양의 채식 식당은 늘 붐비는 만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육류의 소비가 해마다 늘고 있다. 지난날 가난하게 살던 허기를 메우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육식 위주의 식생활이 국민 건강을 위해서나 성격 형성에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다.
도살장에 끌려간 소의 눈을 한번 상상해볼 일이다. 억울하게 죽어간 말 못하는 짐승들의 그 슬픈 눈을…….
모든 생물은 생명의 한 뿌리에서 나누어진 지체임을 알아야 한다. 이상하게도 콩코드의 그 노인 병원을 생각할 때면 콜링가도살장 앞에 늘어선 그 소떼들이 연상된다.
굳이 동서양의 가족관계나 인습을 따질 것도 없이, 사람은 젊건 늙건 살 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되는 일이 아니고, 일찍부터 차근차근 몸에 익히고 마음에 길을 들여 체질화해야 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과 건강을 어떻게 쓰고 있느냐에 따라 그 인생의 우열을 가릴 수 있다. 시간과 건강을 보다 값있는 일에 쓰고 있다면 그 삶은 노소간에 창조적인 삶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한번 지나가면 다시 되찾을 길 없는 소중한 시간과 건강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부질없는 일에 탕진하고 있다면, 그 인생 자체가 소모요, 타락이 아니겠는가.
4
송광사 국제선원에서 지낸 적이 있는 미국인 겔리가 얼마전에 다녀온 티베트와 몽골의 '슬라이드 쇼'를 한다고 초대를 하였다. 장소는 웨이트사이드에 있는 주이시 커뮤니티센터였다.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관인데, 날씨가 맑은 봄밤이었다. 찻길이 막히지 않아 예정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바람에 복도에서 기다려야 했다.
이때 한쪽 방에서 귀에 익은 바흐의 음악이 들려왔다. 그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는 방 쪽으로 가보았다. 텅 빈 홀에 허리가 꾸부정하고 더러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모여 한 노인의 지휘에 따라 열심히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참으로 신성한 광경이었다.
그들은 직업적인 연주자들이 아니다. 한 주일 동안 저마다 자기 일을 하며 지내다가 동호인들끼리 주말에 한자리에 모여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아름다운 선율에 실어 인생의 황혼기를 더욱 향기롭게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건강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들이다.
사람은 자기 몫의 삶을 제대로 살 줄 알아야 한다. 그것도 팔다리에 힘이 남아 있을 때.
다시 <진리의 말씀>
젊었을 때 부지런히 노력하지 않고
재보財寶를 얻어놓지 못한 사람은
고기도 없는 못가의 늙은 백로처럼
쓸쓸히 혼자서 죽어갈 것이다.
젊었을 때 부지런히 노력하지 않고
제보를 얻어놓지 못한 사람은
부러진 활처럼 쓰러져 누워
부질없이 지난날을 탄식하리라. 1988
-텅빈충만 - (29) 시간과 건강에 감사를.........P201~208
'▒▒▒마음의산책 ▒ > 법정스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텅빈충만 - (31) 영평사의 감회 (0) | 2016.12.13 |
---|---|
텅빈충만 - (30) 출가에는 공덕이 없다 (0) | 2014.12.19 |
텅빈충만 - (28) 복의 힘 (0) | 2014.12.17 |
텅빈충만 - (27)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0) | 2014.12.16 |
텅빈충만 - (26) 큰마음 (0) | 2014.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