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산책 ▒/법정스님

텅빈충만 - (21) 분수 지키기

나무향(그린) 2014. 12. 3. 08:29

텅빈충만 - (21) 분수 지키기

 

 세속과 사귀어 미움 사지 말라.

 마음속에서 애정을 끊어버린 이를 사문沙門이라 하고, 세속에 연연하지 않는 것을 출가出家라 한다. 이미 애정을 끊고 세상을 뿌리쳤는데 무엇하러 다시 세상 사람들과 무리를 지어 놀 것인가. 세속을 그리워하고 못 잊어 하면 도철饕餮이 된다. 도철은 본래부터 도의 마음이 아니다. 인정이 짙으면 도의 마음이 멀어지니 인정에 사로잡히지 말라. 출가한 뜻을 등지지 않으려면 명산을 찾아가 깊은 뜻을 탐구하라. 가사와 바리때로 인정을 끊고 주리고 배부른 데에 무심하면 도는 저절로 높아질 것이다.

 

 

       나와 남을 위하는 일 착하다 해도

       그것은 모두 생사 윤회의 씨가 된다

       솔바람과 칡덩굴 달빛 아래서

       오래 새지 않는 조사선祖師禪을 닦으라. <자경문>

 

 

 오늘날처럼 시끄럽고 복잡하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세상에서는 세속과 출세간의 한계가 너무 모호하다. 어디가 세속이고 출세간인지 가리기가 어렵다. 어느 한군데 가려진 곳 없이 샅샅이 드러나 닮은 세상에서는 굳이 세간과 출세간을 구별할 필요조차 없다.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출세간의 수도생활을 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허울과 이름만 수도가 어떻고 수행자가 어쩌고 하지, 실지 생활 속에서는 세속이나 수도 집단이 조금도 다를 게 없다. 어떤 면에서는 수도집단 쪽이 도리어 세속적이고 불순한 점이 훨씬 많을 수도 있다.

 

 "인정이 짙으면 도의 마음이 멀어진다."고 했는데, 어김없는 말이다. 사사로운 인정에 얽혀들면 영원으로 향하는 눈이 가려진다. 열린 마음이 닫히고 만다. 인정과 자비심이 모두 한마음에서 나오긴 하지만, 인정은 어디까지나 사사로운 것이고 자비심은 사사로운 울타리를 넘어선 보편적인 사랑이다. 그래서 사사로운 인정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이다.

 

 나이를 먹어가는 탓인지 요 근래에 들러서 출가 수행자의 분수에 대해서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출가자로서 설 자리 앉을 자리며 나설 때와 물러설 경우를 헤아리는 것이다. 분수를 알고 지키는 일은 본질적인 것이면서 그만큼 어렵다. 한마디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처신하기가 갈수록 어렵다는 말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도 그렇고, 수도생활을 하는 것도 그렇고, 마치 장애물 경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 고비 넘어서면 또 한 고비가 나타나고, 그 고비를 어렵게 넘어서기가 무섭게 또 다른 장애물 앞에 마주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장애물은 단순한 장애가 아니고 삶의 소재일 수 있다.

 

 그 소재를 어떻게 활용하고 극복하고 이끌어가느냐에 따라 삶의 성패가 달린 것이다. 어차피 사람은 어떤 소재를 통해서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존재다. 그래서 분수를 알고 지키는 일이 삶의 과제로 제기된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 우리 곁에 안 계시지만, 어느 해 봄 운허 노스님께서 불쑥 내 산거山居를 찾아오신 적이 있었다. 어린 시자 하나만을 데리고 아무 연락도 없이 찾아오신 것이다. 그때 스님의 말씀으로는 다시 산에 들어와 사는 내 모습을 한번 보고 싶어 오셨다고 했지만, 시자를 통해 들으니 사람을 피해 오셨다고 했다. 광릉 봉선사에서 천리길도 넘는 우리 불일암까지 홀홀히 오신 것이다.

 

 스님의 생신 잔치를 문도와 신도들이 지내려는 낌새를 아시고, 그 자리를 피해 멀리 남쪽으로 길을 떠나오신 것이다. 산거의 생활에 길이 잡히지 않은 때라 나는 황망중에 어설프디어설프게 모시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불일암에서 하루를 쉬시고 다음날은 큰절에서 하룻밤 묵으신 뒤 길을 떠나셨다.

 

 운허 노스님을 해인사와 통도사에서, 그리고 역경譯經 일을 통해서 가까이 모실 수 있어 스님의 성품을 조금은 아는 터이지만, 당신 분수 밖의 일에는 전혀 상관을 하지 않으셨다. 다른 분 같으면 문도와 신도들이 어울려 차리는 생신을 모른 체할 수도 있겠지만, 출가 사문의의 분수에 맞지 않는 일임을 아시고 단호히 그 자리를 피하신 것이다.

 

 옛 어른들의 이와 같은 투철한 삶의 모습은 뒷사람들에게도 표방이 되어야 한다. 명색 출가 수행자가 자신의 생일잔치를 앉은자리에서 넙죽넙죽 받아먹는 것은 아무래도 속스럽고 뻔뻔스럽게 여겨진다. 노스님의 경우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지만, 새파란 젊은 스님들이 극성스러운 신도들에 업혀 그런 잔치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너무나 세속적이다.

 

 출가자와 재가자는 한 부처님 아래 모인 같은 불자佛子이다. 한 불자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써 그 관계가 형성되어야지, 세속적인 인정으로써 맺어진다면 그것은 한낱 세속적인 연줄에 얽히는 일이다. 모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났으면서도 자신들의 분수를 망각하면 다시 세속적인 연줄의 구렁으로 떨어지고 만다. 좋은 가르침을 만났다면 그 가르침을 통해서 거듭거듭 새롭게 탄생되고 형성되어가야 한다.

 

 

 흔히 하는 말로, 극성스런 신도들 때문에 중 노릇 하기 어렵고, 무례하고 염치없는 중들 때문에 나가던 절에도 안 나간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 극성과 무례와 염치는 언젠가는 개선되어야 한다. 우리들의 삶에 개선이 없다면 그것은 한낱 타성이고 습관이고 업의 놀음이다.

 

 그릇된 타성과 습관과 업의 놀음을 돌이키려면 투철한 삶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한칼에 두 동강을 내는 그런 투철하고 준엄한 의지 없이는 누구도 어름어름 넘어가고 만다.

 

 내가 잘 아는 어느 절의 주지 스님은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러 신도들이 서울에서 버스를 대절하여 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지난 여름의 어느 날 함께 자리를 피한 적이 있다.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정상적인 양식과 안면신경을 지닌 스님들은 절에서 하는 세속적인 생일치레 같은 것을 혐오한다.

 

 출가 수행자에게 생일이 어디 있겠는가. 한 자연인의 출생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참으로 가려야 한다면 청정한 법신의 탄생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진정한 불법을 만났다면 날마다 생일일 수 있어야 한다. 바른 가르침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연유를 알고 극성스런 신도와 후안무치한 스님들은 제발 절(수도원)에서 생일치레 같은 속된 놀이를 말았으면 좋겠다.

 

 

  얼마 전 볼일로 대구 관음사에 들렀다가 응접실에서 보성 스님의 담담한 글씨로 쓴 족자가 눈에 띄어 마음에 새겨두었다.

 

       오랫동안 티끌 속에 묻혀 지내느라

       본래의 일을 까맣게 잊었으리

       어서어서 온갖 일 걷어치우고

       서둘러 청산으로 돌아오너라.

 

 요즘의 산이래야 옛날의 산중처럼 맑고 고요하지만은 않다. 어떤 때는 오히려 도시의 주택가가 보다 맑고 고요할 때가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산에는 모든 생명이 깃드는 곳. 청정한 수목이 자라고 시냇물이 흐르고 새가 노래하고 맑은 바람이 감돈다. 그리고 영롱한 별빛이 있고 투명하고 상쾌한 천연의 공기가 있다. 이와 같은 천진의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봄으로써 자신의 투명도와 분수를 때때로 가늠할 수 있다.

 

 일 때문에 시끄러운 저자에 나가 머물지라도 수행자는 그의 고향인 숲을 등지지 말아야 한다. 이따금 그 숲에 돌아와 때를 벗길 줄도 알아야 한다.

 

 5조 홍인弘忍 선사의 법문에 이런 말씀이 있다.

 

 "큰 집의 재목은 심산유곡에서 나온다. 처음부터 세상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가에서 멀리 떠나 있기 때문에 톱이나 도끼의 해를 입지 않고 큰 재목이 된 것이다. 정신을 깊은 골에 숨겨 그 성명性命을 산중에 기른다. 눈앞에 거리낄 게 없으니 마음은 저절로 안정을 이룬다. 이와 같이 해야 도의 나무에 꽃이 피고 선의 숲에 열매가 맺힌다."

 

 세속에 물들면 본래의 빛이 바랜다. 너무 가까이 말라. 1986                  -텅빈충만 - (21) 분수 지키기 ......P149~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