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지붕 위에서 내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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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구 돌
1976년 괴산 연풍 성지를 개발할 때 두 개가 발굴되어 하나는 그 자리에 두고 다른 하나는 절두산 순교성지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그 후에 또 하나가 발굴되어 현재 연풍 성지에 형구돌이 두 개가 보존되어 있다 한다. 형구돌은 교수형을 집행했던 형구로 가운데 구멍으로 밧줄 올가미를 만들어 넣어 죄인의 머리에 올가미를 씌우고 반대편에서 밧줄을 잡아당겨 머리가 돌에 부딪쳐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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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원군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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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사적 제399호)
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입을 계기로 많은 신자들을 참수해 처형했던 장소다. 잠두봉은 봉우리가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잠두봉 주변에 있었던 양화나루터는 잠두봉이 사적으로 지정된 뒤 추가로 지정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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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두산 성지. 140307.
-절두산 본래 이름은 양화진(버들꽃나루).
글을 옮겨보면, 한강을 중심 무대로 삼은 조선왕조에서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였다고 한다.구한말 조선과 서구 세력의 물리적 충돌은 수상에서 일어났는데, 양화진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한다.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응징하자, 처형당한 순교자 가운데 9명의 프랑스 성직자에 대한 책임을 묻기위해 프랑스 군함 두 척(세 척?)이 1866년 8월에 양화진까지 침범했다가 같은 해 10월 강화도에서 패퇴하는 병인양요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의 척화 의지는 더 강화되었고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도 극심해 졌다 한다. 대원군은 오랑캐에게 더럽혀진 한강을 그들과 통하는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고 양화진 앞 한강물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물들였다 한다. 그리하여 절두산이라는...이름만 들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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