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산책 ▒/법정스님

아름다운 마무리 - (39) 우리가 살 만한 곳은 어디인가

나무향(그린) 2011. 5. 12. 08:53

우리가 살 만한 곳은 어디인가

 

 한곳에서 12년을 살다 보니 무료해지려고 했다. 내 인생의 60대를 이 오두막에서 보낸 셈이다.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는 사람 없는 곳에서 한두철 지내려던 것이 어느새 훌쩍 열두 해가 지났다. 돌아보면, 한 생애도 이렇듯 꿈결처럼 시냇물처럼 덧없이 흘러가리라.

 

 지난 한 해 동안은 내 마음이 떠서 한곳에 정착하지 못했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새로운 삶을 시도했다. 그러다가 올봄에 생각을 돌이켜 다시 이 오두막에 마음을 붙이기로 했다.

 

 그대로 주저앉을 수가 없어 내 성미대로 봄내 집안 일을 했다. 삭아서 주저앉은 마루를 갈고, 비가 새는 지붕 천장을 덧댔다. 온갖 파충류의 은신처인 바깥마루를 뜯어내고 거기 구들을 놓았다. 바깥마루 천장에는 '93년 입하절에 보수하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내가 이곳에 들어온 그 이듬해다.

 

 주방도 너무 낡아 죄다 뜯어내고 새로 갈았다. 집 안으로 물이 들어오도록 개울물을 이용해 수도를 놓았다. 불을 지필 때마다 틈새로 연기가 새던 낡은 무쇠난로를 들어내고 새것으로 들여놓았다. 창 바르고 도배할 일이 남았지만 지쳐서 일단 쉬기로 했다.

 

 누가 보면 천년만년 살 것처럼 저러나 싶겠지만 일단 내가 몸담아 사는 주거공간은 내 삶의 터전이므로 내 식대로 고쳐야 한다, 오늘 살다가 내일 떠나는 일이 있더라도 오늘 내마음이 내켜서 하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내 가풍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행자가 살다가 간 빈자리를 누가 와서 살더라도 덜 불편하도록 하는 것이 또한 내 도리이고 지론이다.

 

 지난해 봄 고랭지의 선연한 빛깔에 매혹되어 작약을 1백그루나 화원에서 사다가 뜰가에 심었는데, 집을 비운 사이 한 포기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캐 간 도둑이 잇었다. 언젠가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폭설로 길이 막히기 전에 미리 올려다 놓은 취사용 가스를 모조리 못쓰게 만든 그런 손도 잇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같은 사람의 처지에서 인간의 소행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擇里志>라는 책이 있는데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지형, 풍토, 풍속, 교통, 각 지방의 고사, 인물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서술하고 잇다.

 

 그는 사람이 살 만한 조건으로 네 가지를 꼽고 있는데, 자연과 인문사회적인 조건과 함게 그 고장의 인심을 들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사람이 살 만한 터를 잡는데는 첫째, 땅과 산과 강 등 지리가 좋아야 하고, 둘째는 땅에서 생산되는 것이 좋아야 하며, 셋째는 인심이 좋아야 하고, 넷째는 아름다운 산과 물이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모자라면 살기 좋은 곳이 아니다."

 

 꿈같은 이야기다. 21세기, 바야흐로 정보화의 물결이 넘치고 있는 이 땅에서는 어느 고장을 가릴 것 없이 황량하고 흉포해진 인심의 평준화를 이루고 잇다. 사바세계의 인간 말종위 실상을 그대로 연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가 의지해 살아가야 할 곳이다. 못된 인심보다는 그래도 착한 인심이 훨씬 많다. 우리 둘레에는 예나 다름없이 철 따라 꽃이 피고, 새들이 찾아오고, 마른 나뭇가지에서 새잎이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내 오두막에서도 여전히 물이 흐르고 꽃이 피고, 우리 봉순이(박항률 화백이 법정 스님에게 그려 준 단정한 얼굴에 단발머리, 노란색 웃옷에 보랏밫 스카프를 두른 소녀상. 봉순이란 이름은 법정 스님이 붙여 준 그림 속 소녀의 이름이다. - 편집자 주)가 나를 기다리고 잇다.     p170-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