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찰 명 : 파계사
소 재 지 : 대구광역시 동구 중대동
전화번호 : 053-984-4550
성보문화재 : 50개
자료참조 : 전통사찰 관광
↑원통전
↑ 대소인개하마비
△ 파계사 = 경상북도 대구시 중대동 팔공산에 있는 절.
-804년(신라 애장왕 5) 심지 왕사(心地王師) 창건. 1605년 계관(戒寬) 중창. 1695년 현응(玄應) 3창. 1648년 세운 원의 대사(圓義大師)의 비와 부도, 1658년 세운 전명대사(傳明大師)의 비와 부도, 1701년 세운 현응 대사의 비와 부도가 있음.
조선의 억불숭유정책과 유림들의 횡포를 한 스님의 지혜 막아낸 사찰이 바로 파계사입니다. 파계사 중창주이신 영원스님은 숙종임금 으로부터 왕가의 위패를 사찰에 모시는 윤허를 받아내고 사세를 확장하였습니다. 파계사가 왕가의 비호를 받게 된 연유에는 영원스님의 다음과 같은 혜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조 숙종임금이 어느날 대궐 속으로 승려가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이 너무 선명하여 신하를 시켜 남대문 밖을 살펴보게 하니, 정말 한 승려가 그 앞에서 쉬고 있었다. 그 승려가 바로 파계사의 영원선사였다. 기이하게 여긴 숙종임금은 영원선사에게 왕자탄생을 위한 백일기도를 부탁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숙빈 최씨에게 태기가 보였고, 이듬해에 왕자가 탄생하였으니 바로 영조대왕이다. 크게 기뻐한 숙종임금은 영원선사에게 현응이라는 호를 내리고, 40리에 걸쳐 나라에 거두던 세금을 모두 절에서 거두라고 했다. 스님은 거절하면서 대신 경내에 선대임금의 위패를 모시도록 윤허해 주시기를 간청, 윤허를 받았다. 스님은 절로 내려와 기영각을 세우고 선대왕의 위패를 모시니 지방 유생들과 양반의 행패는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왕가의 비호속에 불사를 여법하게 성취 하였으며, 각종 부역의 피해 없이 승려들이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게 하였다.”
왕가와 파계사는 관계는 기영각 이외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기영각에는 성종 숙종 덕종 영조의 위패가 모셔져있습니다. 숙종의 명으로 세워진 대소인개하마비(大小人皆下馬碑)는 일주문 지나 사적비 부근에 있는데, 하마비 자체가 왕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어 유생들의 횡포를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숙종의 하사품인 병풍 2점과 구슬 2개도 남아 있습니다. 영조대왕이 11세에 썼다는 자응전(慈應殿) 편액은 성전암 법당에 걸려있으며, 영조대왕 어의는 원통전 관음보살상 복장에서 나왔습니다. 정조대왕의 어필 천향각 현판도 있습니다.
관람포인트
1) 숙종 영조대왕과 매우 인연이 깊은 사찰입니다. 곳곳에 아직도 남아 있는 왕들의 흔적(기영각, 대소인개하마비, 병풍2점과 구술2개, 영조대왕의 자응전 편액, 영조대왕 어의, 정조대왕의 어필인 천향각 현판)을 찾아보십시오.
2) 원통전을 중심으로 진동루, 설선당, 적묵당 등 당우 4채가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니,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3) 파계사라는 사명 자체가 계곡을 잡는다는 뜻입니다. 파계사의 자연의 아름다움은 주변에 가득합니다. 현재의 주차장도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연못이었으니까요. 골짜기의 지기를 눌러주는 "진동루(鎭洞樓)"가 가파른 계단 위에 버티어 있습니다
4) 주위 깊게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담장속에 숨겨진 굴뚝이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5) 경내의 모든 전각들이 돌축대 위에 건립되어 있습니다. 돌축대도 살펴보면 재미가 있습니다.
6) 진동루 앞에는 영조와 파계사의 인연을 기념하여 ‘영조나무’로 이름 붙여진 250년 정도 된 느티나무가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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