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 : 사적 제362호
명 칭 : 서울 연산군묘 (서울 燕山君墓)
분 류 :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면적 : 14,301㎡
지정일 : 1991.10.25
소 재 지 :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77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정릉관리소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 사적 제362호 - 서울 연산군묘.
-조선 10대 연산군(재위 1494∼1506)과 부인 거창 신씨의 무덤이다.
연산군은 성종의 큰 아들로 성종 7년(1476)에 태어나 1494년 왕위에 올랐다. 두번씩이나 사화를 일으키는 등 성품의 광폭함이 드러나자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나, 1506년 왕직을 박탈당하고 연산군으로 강봉되어 강화 교동으로 추방되었다가, 그 해 1506년에 죽었다. 부인 신씨가 연산군 무덤을 강화에서 현재의 이곳으로 옮겨 달라 청하여 옮기게 되었다.
무덤 주변에는 연산군의 딸과 사위의 무덤도 있으며, 혼유석·장명등·향로석 등 석물이 서 있다. 묘비석 앞면에는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정덕팔년이월이십일장<正德八年二月二十日葬>’이라 새겨져 있다.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1494~1506
휘는 융. 폭군으로 무오사화,갑자사화,병인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임. 중종반정으로 폐위됨.-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강화도로 유폐되어 병사하여 그곳에 안장되었던 것을 연산군 부인 폐비 신씨가 중종에게 이장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여 1513년 이곳 도봉구 방학동으로 이장되었다.
연산군(1476~ 1506)은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성종의 큰 아들로 태어나 7살 때 세자로 책봉되어 19세에 조선 10대 임금으로 올랐다.그러나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통해 패륜적인 일을 저질러 왕위에서 쫒겨났다. 그는 생전에 부인 신씨 사이에 2남1녀를, 후궁 사이에 많은 자녀를 두었으나 아들들은 모두 태어나면서 죽거나 귀양지에서 모두 죽었다.
-능,원.묘의 차이: 왕족의 무덤은 능 .원 .묘로 구분하는데, 능은 왕과 왕후의 무덤을 말하고, 원은 세자, 세자빈 또는 왕을 낳은 친아버지,친어머니가 묻힌 곳을 말하며, 묘는 그 외의 왕족의 무덤을 말한다. 연산군 및 광해군의 묘소의 경우 한때 왕이었으나 폐위되어 군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에 능이 아닌 묘로 불리게 되었다.
-연산군 생모 폐비 윤씨는 가난한 양반집 딸로 궁에 들어와 빼어난 미모로 성종의 총애를 받아 1473년 숙의에 봉해졌고원비 공혜왕후 한씨가 승하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해 연산군을 낳았으나 심한 투기와 모함으로 폐위되어 1482년에 사약을 받았다.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가 연산군 묘에 있는 까닭: 의정궁주 조씨는 세종4녀(1422)에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었지만 곧 태종이 승하하여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고 궁주의 작호를 받았다. 의정궁주의 묘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이 땅은 본래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땅이었으며 임영대군은 왕명으로 후사가 없던 의정궁주의 제사를 맡게 되어 현 위치에 묘를 조성하게 되었고, 그후 임영대군의 외손녀인 연산군 부인 신씨의 요청에 의해 의정궁주 묘 위쪽에 연산군 묘를 이장한 것이라 한다.
*연산군묘 위치:도봉구 방학동 산 77 *가는길: 지하철 1호선 창동역 1번 출구- 1161.1144변 버스. 4호선 쌍문역 2번 출구-130번 버스(연산군,정의공주묘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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