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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대 순종(純宗, 1874~1926) 1907~1910 - 금곡 유릉

나무향(그린) 2010. 12. 10. 11:57

종 목 : 사적 제207호

명 칭 : 남양주 홍릉과 유릉 (南楊州 洪陵과 裕陵)

분 류 :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면적 : 1,211,286㎡

지정일 : 1970.05.26

소 재 지 :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금곡동)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홍유릉관리소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 유릉 능침 - 문화재청

 


 


 


 


 

△ 사적 제207호 - 남양주 홍릉과 유릉 / 유릉. 130409.

 

-유릉은 순종과 동비 순명효왕후, 동계비 순정효황후의 무덤이다. 조선왕조 무덤 중 한 봉우리에 3개의 방을 만든 동봉삼실릉은 유릉 뿐이다. 12면의 면석에 꽃무늬를 새긴 병풍석과 12칸의 난간석을 세웠다. 무덤 아래에는 침전이 정자각을 대신하였으며 그 아래 문·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상 등을 배치하였다.

홍릉과 유릉은 철종 이전의 무덤과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종을 황제로 칭하게 됨으로 제릉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서 석물의 규모나 종류가 달라졌으며, 임금의 침실, 제사지내는 방의 위치가 달라졌다. 2개의 무덤을 하나로 묶기위해 외곽으로 담장을 설치하였으며, 양릉 중간에 돌로 만든 연못을 두었다.

 

제27대 순종(純宗, 1874~1926) 1907~1910

이름은 척(拓). 고종의 둘째 아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35년간 치욕의 일제시대를 보내게됨. 이왕(李王)으로 불림.

 

- 제27대 순종(純宗)과 황후(皇后)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 유릉(裕陵)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洪裕陵 소재 > 사 적 : 제 207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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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純宗, 1874년(고종 11년) 음력 2월 8일(양력 3월 25일)~1926년 양력 4월 25일)은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이다. 연호를 따 융희제(隆熙帝 : 재위 1907년~1910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李), 는 척(坧), 본관전주(全州), 는 군방(君邦), 는 정헌(正軒), 정식 시호는 순종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純宗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이다. 고종명성황후의 아들이며, 고종의 장성한 자녀 중 유일한 적자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왕(李王)으로 불렸다.

고종과 황태자 시절의 순종

 

고종의 유일한 적자이자 장자로 명성황후 민씨 소생이며, 어려서부터 병약하였고 후사는 없다. 그의 아호 정헌(正軒)은 부황 고종이 그에게 내려준 아호였다. 그는 한국 역사상 최후의 군주이기도 했다.

대한제국 순종 사진

 

1907년 7월 20일부터 1910년 8월 22일까지 재위하는 동안 1907년 7월 20일부터 1909년 7월 12일까지 친정을 하였고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 사건으로 대한제국 주재 일본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에게 실권이 박탈되어 1909년 7월 12일부터 1910년 5월 30일까지 소네 아라스케실권을 잡았으며 1910년 5월 30일부터 1910년 8월 29일 퇴위할 때까지 역시 대한제국 주재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가 실권을 잡았다.

대한제국 순종​

 

 동학혁명-- 조선 팔도에서는 굶주리다 못한 백성들이 작당하여 화적火賊, 초적草賊이 되었고, 전라도에서 일어난 동학혁명이 삽시간에 호남 일대를 휩쓸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무능도 무능이려니와 관군만 보내어도 될 것을, 청병을 동원케 하여 혁명을 진압시키다가, 일본의 감정을 사 마침내 청일전쟁을 유발시키게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하루아침에 팔도가 싸움터로 변하였고, 전쟁이 끝나자 승리한 나라는 일본이었고, 비참해진 나라는 조선이었다. 

 러시아-- 그러나 일본에게는 뜻밖에도 새로운 또 하나의 강적인 러시아가 나타나서, 그들이 청일전쟁을 통하여 피로써 확보한 여러가지 이권을 러시아가 가로채게 되었다.

 을미사변-- 이 때 정상형井上馨의 후임으로 온 일본 공사 삼포三浦는 무인 기질이 농후한 자로서 불리한 역전에 크게 분개하여 친로파인 민씨 일파를 타도하고자 하였다. 그는 반민파인 개혁당을 충동해서 공덕리에 퇴거하고 있는 대원군을 다시 추대케 하고, 고종 32년 을미 8월 12일 깊은 밤중에 대궐로 쳐들어 갔다. 이것이 이른바 을미사변으로, 이 때 민비는 왜놈의 칼에 찔려 무참한 최후를 마치었다.

 김홍집-- 을미사변과 함께 정권은 다시 개화당으로 넘어갔다.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은 세계사조에 발맞추어 착착 새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 나라의 백성들은 맹렬한 반대운동으로 이 신개혁을 뒤엎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자 러일전쟁이 발발하였고, 일본의 승리는 이 땅에 내뻗어 통째로 집어 삼키게 된것이다. 

 강제퇴위-- 을사늑약과 통감부 설치, 헤이그 밀사 사건을 핑계로 그들은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광무 11년에는 소위 정미 7조약이란 것으로 우리나라의 군대도 해산시켜 버렸다.  

 한일합병-- 이리하여 융희 4년 8월 29일에는 일본의 육군 대신 사내寺內의 강박 아래, 어전회의가 열려 드디어 한일합병서에 이완용 등 매국 칠대신들이 서명함으로써 역년歷年 27대 519년으로 조선 왕조의 등불은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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