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리에서 / 이형권
그대가 잠시 내 곁에 머물다 간 사이
은사리 단풍나무는 붉게 물들었다.
햇살이 강물 위에 부서지는 오후처럼
바람이 산그늘을 스쳐가는 해질녘처럼
짧은 순간이었다.
그대가 나에게 건냈던 첫 인사처럼
수줍고 이쁜 말들이
저토록 황홀하게 타오르는 그리움이 될 줄은
정녕 모를 일이었다.
내가 처음 그대를 만났던 날은
멀리 타관을 떠돌아 온 뭉게구름이
요사채 툇마루에 바랑을 벗고
이제 막 방부를 드릴 참이었다.
사랑은 더러 상처가 되기도 하고
주춧돌처럼 붙박힌 추억이 되기도 하지만
나는 속세의 사랑이 알 듯도 모를 듯도 하여
문수전 돌부처처럼 두손 모으고
짐짓 발부리만을 바라볼 뿐이었으니
먹감나무 가지에 까치가 울고
입동무렵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뒤란에 스밀 때
그대가 나의 귓가에 속삭이던 말들로 하여
그렇게 푸르렀던 한시절이 저물고
은사리 단풍나무는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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