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평전]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그럼이 없기를
1910년대의 북간도 명동-그곳은 조국을 잃은 우리의 조상들이 살기 위하여, 새로운 힘을 길러 나라를 되찾고자하여 모인 곳이었다. 황무지였던 그곳에는 학교가 생기가 교회가 생겨나 우리 민족의 새로운 도약의 본거지가 되었다. 그곳에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는데 시인 윤동주도 바로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1917년 12월 30일 명동중학교의 교원인 윤영석의 맏아들로 태어난 윤동주의 어린 시절 이름은 해환이었다. 윤동주가 태어난 생가는 그의 할아버지가 손수 만든 집이었다. 함북 회령이 고향이신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북간도로 이주하여 손수황무지를 개간하여 옥토를 만들었으며 기독교가 들어오자 신자가 되어 윤동주가 태어날 무렵에는 장로가 되었다.
윤동주는 할아버지의 근면 성실한 성품을 이어받아 일찍부터 자기의 일은 스스로 처리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린 동주는 잡지<어린이>의 열혈한 애독자였다. 그는 서울에서 사 온 잡지를 밤새워 읽었으며 스스로 글을 써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친구인 송몽규 등과 함께 <새명동> 이란 벽보판 문예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아홉 살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한 동주는 글뿐아니라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서 시간이 나는대로 명동촌의 아름다운 풍경을 도화지에 옮기곤 하였다. 그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는데 그러한 그의 성품은 그의 시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의 시 <자화상>은 그의 유년기 추억이 담긴 것으로 우물을 소재로하여 자아상실의 나르시시즘을 그린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자가> <슬픈 족속> <또 태초의 아침> 등에서는 명동촌의 아름다운 정서를 읽는 이로 하여금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명동 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중국인의 대납자 소학교에 편입하여 한 해를 보냈는데 이때에 <별 헤는 밤>에 나오는 패, 경, 옥 등의 소녀들을 만난 것으로 생각 되어진다.
중국인 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다시 용정의 은진 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 학교는 캐나다 선교원들이 경영하는 미숀계 학교였다.
그 무렵, 명동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그의 아버지가 용정으로 이사를 하여 인쇄소를 차렸는데 이렇다할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하지만 동주의 학교생활은 매우 활동적이었다. 공부는 물론 놀기도 잘하였던 그는 박태진 등과 축구 선수로 뛰기도 하혔으며 집안일도 잘 도와 자신의 옷은 직접 꿰매입기도 하였다.
한편, 은진중학교에는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깨우쳐주는 교사들이 많았는데 특히 동양사와 국사를 가르치던 명회조 선생은 학생들이 조국의 실상과 우리 민족이 처한 상황을 똑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이로 인해 동주의 의식에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1935년 봄 3학년을 마칠 무렵 동주는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평양숭실중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그 무렵 시인 백석의 <사슴>이란 시집이 출간되었는데 이 시집은 백부 한정판이었기 때문에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때 동주의 문학열은 매우 대단하여 도서실에서 하루를 보내며 시집을 모두 베끼기도 하였다.
우리나라를 강제로 빼앗은 일제의 탄압은 1930년대가 되면서 더욱 심해졌는데 1930년 중반부터는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학생과 일반인은물론 기독교인들에게도 강제로 신사를 참배하게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이를 거부하자 기독교인들에게 탄압이 가중되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는 뾰족한 못을 잔디처럼 박아놓은 판자 위를 걷게 하는 고문을 당하여 끝내 옥에서 순절하였다. 일제의 만행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기독교학교에서까지 미치기 시작하여 평양신학교와 숭실중학교도 폐교를 당하고 말았다.
고향으로 돌아간 동주는 그 이듬해 광명중학교에 편입을 하였는데 당시 그는 간도에서 발간되었던 <카톨릭 소년>지에 동주라는 이름으로 동요를 발표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여 나라 안팍이 시끄러울 때 동주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오로지 문학에만 뜻이 있던 동주는 연회전문학교의 문과에 진학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고 말았다.
" 이 어려운 시기에 문학을 한다는 것은 찬성하지 못하겠다. 네가 의학을 한다면 계속 공부를 시키겠지만그렇지 않다면 공부를 그만 두는 것이 좋겠다.
아버지의 듯은 너무나도 강경하였다. 아버지가 이렇게 반대를 한 것은 자신의 실패 때문이었다. 젊은시절 문학에 뜻이 있었던 아버지는 북경과 도꼬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교편을 잡았지만 이렇다할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탓으로 생활이 어려웠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동주가 실패를 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동주와 아버지의 대립은 반년 남짓 계속되었다. 이에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뜻을 접게하여 동주는 19*38년 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다.
동주는 여름과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집에 돌아왔으며 집에 돌아오면 발벗고 집안일을 돌보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의 손에는 릴케이나 발레리의 시집이 들려 있었다.
동주는 연희 전문에 입학하면서 독서 범위도 부쩍 늘어갔다. 그리하여 그가 방학때마다 집으로 가져온 책은 몇 년 사이에 8백 권이 넘어설 정도로 지성이었다.
그가 애독하던 잡지로는 <문장> <인문평론><세르빵><시와 시론><흙과 백>등이 있었으며 그가 소장한 희귀본으로는 천연색 화집인 <오지호(吳之湖)˙ 김주경(金周經)2인 화집>과 최현배의 <우리말본> 등이 있다.
동주의 세심한 마음씨는 곳곳에나타나 한 포기의 들꽃이나 나뭇잎도 그대로 지나치지 않아 가슴에 꽂거나 책갈피에 꽂기도 하였다. 길을 가다가 놀고 있는 어린이가 있으면 같이 놀아주고 부역하는 아낙네들에게 정다운 말 한마디 나누고 싶어 하였다.
동주가 입학할 무렵의 연희전문에는 민족정신이 투철한 유명인사들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최현배를 비롯하여 이양하 손진태 정인섭 하경덕 민태식 김두헌 등이 그들이다. 특히 최현배는 학생들의 숭앙을 한 몸에 받으며 한글을 통해 민족의 얼을 학생들에게 심어 주었다. ↓ 계속
* 윤동주 연보
1917년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출생
1925년 명동 소학교 입학
1929년 송몽규 등과 문예지 {새 명동} 발간
1932년 용정(龍井)의 은진 중학교 입학
1935년 평양 숭실 중학교로 전학
1936년 숭실 중학 폐교 후 용정 광명 학원 중학부 4학년에 전입
1938년 연희 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
1942년 릿쿄(立敎) 대학 영문과 입학, 가을에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로 전학
1943년 송몽규(宋夢奎)와 함께 독립 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
1945년 2월 16일 큐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유고 시집,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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