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산책 ▒/법정스님

아름다운 마무리 - (15) 때깔 고운 도자기를 보면서

나무향(그린) 2011. 4. 19. 06:54

때깔 고운 도자기를 보면서

 

 겨울 안거를 마친 바로 그 다음날, 남쪽에 내려가 열흘남짓 이곳저곳을 어정거리며 바람을 쏘이다 왔다.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꽃이 필 만하면 갑자기 추위가 닥쳐 겨우 피어난 꽃에도 꽃다운 생기가 없었다. 매화도 그렇고 수선도 그랬다.

 

 풋중 시절부터 나는 안거가 끝나고 해제가 시작되는 바로 그날 누가 어디서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일찍 길 떠나기를 좋아했다. 미적미적 미루다가 김이 빠져나간 후에 길을 떠나면 나그넷길의 그 심선감이 소멸되고 만다.

 

 선원에 다니던 시절에는 후원에서 미리 아침공양을 대충 때우고 첫차를 타기 위해 걸망을 메고 동구길을 휘적휘적 나서면 새벽달이 숲길을 훤히 비춰 주었다. 이 또한 해제의 일미一味다. 만일 첫차가 아니고 두번째 차편이나 밝은 대낮에 길을 떠나면 해제의 그 맛이 시들해진다.

 

 남쪽에서 꽃을 만나고 돌아오니 이곳은 갑작스런 폭설이 내렸다. 기상 용어로 '북동기류의 영향'으로 이름 그대로 춘설이 난분분했다. 꽃 대신 설경산수를 펼쳐 보인 것이다. 오랫만에 나무마다 소복소복 쌓인 눈이 포근한 본기운을 느끼게 한다. 얼어붙었던 개울도 가장자리만 남기고 녹아 흐르는 물소리가 덕지덕지 쌓인 겨울의 찌꺼기들을 씻어 내는 것 같다.

 

 한바탕 쓸고 닦아 낸 후 지고 온 짐을 풀었다. 새로 가져온 오지 물병을 창문 아래 놓아두고 벽에 기댄채 이만치서 바라보고 있으니 내 안에서도 봄기운이 움트는 것 같았다. 이 오지 물병은 목이 길어 학처럼 늘씬한 몸매다. 자꾸만 눈길이 간다.

 

 보성 미력옹기의 이학수 님이 나를 위해 빚어 준 것인데 그 사연은 이렇다. 작년 가을 불일암에 사는 스님들과 함께 보성 차밭에 가는 길에 미력옹기에 들렀었다. 스님들은 이것저것 소용될 그릇들을 고르고 나는 찻물을 담기 위한 물병을 하나 골랐었다. 그릇은 마음에 들었지만 그 용량이 적은 게 아쉬웠다. 이런 뜻을 알고 주인이 나를 위해 좀 큰 것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이번에 들렀더니 비슷비슷하게 만든 두 개를 내주며 다 가져가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중 작년에 구해 온 것과 같은 형태의 것 하나만을 골랐다. 두 개를 갖게 되면 하나만을 지녔을 때의 그 풋풋함과 살뜰함이 소멸되고 만다. 이것은 내 지론이다. 어떻게 두 개를 똑같이 사랑할 수 읶겠는가.

 

 내 독자이기도 한 주인에게 부끄럽지만 그 자리에서 내 심경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요즘에 이르러 이것저것 세속적인 욕심은 어느 정도 빠져나간 것 같은데, 때깔이 고운 그릇을 보면 아직도 곁에 두고 싶은 생각이 인다고. 함께 웃었다.

 

 이런 내 '욕심'은 얼마 전 곤지암의 보원요에서도 발휘되었다. 이따금 보원요에 들르면 지헌 님은 쌀과 콩, 무, 김치등 오두막에 소용될 것들을 이것저것 챙겨 주어 그때마다 염치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도 대청마루에 놓인 그릇들을 보다가 단정하게 빚은 다완을 매만져 보았더니 주인은 내 마음을 읽고 선뜻 싸서 주었다. 말차 다완으로 두어번 쓰다가 초를 넣어 불단을 밝혔더니 은은한 그 불빛이 부처님 모습과 매우 잘 어울렸다.

 

 가끔 이당도예원에 들을 때도 이런 내 욕심은 멈추지 않는다. 한번은 오래전에 만들어 작업실 한쪽에 먼지를 뒤빕어쓰고 있는 필통에 눈길이 닿자 먼지를 털어 얻어 오기도 했다.

 

 언젠가는 때깔이 고운 도자기 앞에서도 욕심을 부리지 않고 무심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아마 내 삶도 탄력이 느슨해질 것이다. (p7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