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권무심재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15) 초원의 노래

나무향(그린) 2017. 12. 9. 07:30

 

초원의 노래 / 이형권

 

초원으로 가리라.

밀원을 스치고 불어오는 부드러운 저녁 바람을 찾아서

가없는 방랑자가 되리라.

가서 이몸, 뼈도 주고 이몸, 살도 주고

자줏빛 붉은 노을이 되어 하늘 끝까지 걸어가리라.

 

 

넓고 넓어서 텅 비어 버린 세상

초원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나그네가 되리라.

제국도 사랑도 영원하지 않았지만

오직 계절 따라 피는 풀꽃과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들만이 영원한 땅

그곳에서 아득해진 세월의 길을 따라 걸어가리라.

 

 

하루는 귀머거리가 되어서 초원의 노랫소리를 듣고

하루는 벙어리가 되어서 초원의 꽃들에게 말을 건네고

하루는 눈 먼 장님이 되어서 노을 속에 앉아 있으리라.

언덕 너머 양떼를 몰고 오는 목부들의 그림자에 날이 저물면

훈훈하게 타오르는 모닥불 곁에서

쉰내 나는 마유주馬乳酒 한 잔을 마시며

초원에 찾아온 어둠의 빛깔을 헤아려 보리라.

 

 

초원은 떠도는 유목민들의 고향

파란 불꽃으로 타오르는 고독이 흐르고

삶은 햇볕에 말라 가는 조랑말의 배설물처럼 건조해져

아무런 가식도 없이 선한 짐승의 눈망울을 닮아 있고

들꽃 피는 길을 따라 그리움은 그리움을 낳고

아침 햇살에 빛나는 이슬처럼 초원은 슬픔을 소진하기 좋은 곳.

그곳에서는 잠시 운명의 시간을 벗어 놓아도 좋으리.

부질없는 세상의 모든 날들을 호명하여

눈물겹게 화해하여도 좋으리.

그리하여 나는 초원으로 가리라.

초원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나그네가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