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향(그린) 2017. 11. 2. 05:46

 옛 생각 / 이형권 


아주아주 어릴 때였습니다.
외할머니 집에 갔다가 오는 길에
울음보가 터져버린 날이 있었습니다.
서당등 솔밭을 지나
청호쟁이 모퉁이를 지나면서 시작한 눈물이
산막리를 지나 잿등 숭어바위를 지나오도록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솔무랭이 동백숲에 주저앉아 한참을 달래보았지만
방천 난 논둑처럼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해거름이 된 뒤에야 뒷방에 들어
이불을 쓰고 잠이 들었던 날이었습니다.

외갓집에는 옛날 이야기책처럼 서글픈
할머니가 두 분 계셨습니다.
평생을 자기 속으로 아이를 낳아보지 못했던 큰 할머니는
곱게 비녀단장을 하고 화롯가에 앉아서
구성지게 옛날 이야기책을 읽어주었습니다.
어머니를 낳았던 친할머니는 갈퀴손같이 일만 하시다.
중풍을 맞아 오줌단지처럼 문설주에 앉아 계셨습니다.
제 설움에 겨웠는지 할머니는
강아지처럼 나를 쓰다듬으며
그렁그렁 눈물바람이었습니다.
소복소복 눈이 내린 날이면
어디선가 부엉이 한 마리가 날아와
할머니의 세월을 함께 울어주었고
철부지였던 우리들은 오소리새끼들처럼
옛 이야기를 졸라대다가
푸른 안개가 내리는 열두 강물을 건너
꿈나라에 들곤 했습니다.

그해 겨울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보리밭 고랑이 넘치도록 쌓였던 눈이 녹고
개학 날자가 다가오자 할머니 품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오오냐 내 새끼야 잘 가그래이 명년 방학 때 또 오그래이"
서당등 솔밭을 지나면서 할머니의 인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세차고 매서운 겨울바람 탓이었는지
하염없이 눈물바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뭇없이 잊혀 진 세월을
낯선 길로만 헤매고 다녔습니다.
광원암에서 불일암으로 다시 감로암에서 부도암으로
오늘은 조계산의 가을 숲길을 헤매는 길손이었습니다.
가장 늦은 때를 기다렸다가 숯불처럼 타올라
조계산의 가을을 마무리 짓는
돌각담의 단풍나무를 찾아가는 길에
무너져 내리는 가을 숲의 숨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길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나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불현듯 아주아주 어릴 적
외갓집에서 돌아오던 길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짜리 아이가 되어서
엉엉 울면서 깊은 산중을 헤매고 싶은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