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향(그린) 2017. 10. 30. 05:48

산촌기행 / 이형권

 

가을 햇살이 운동회를 여는 날
백두대간 산골마을이 소란하다.


단풍나무 웃음소리가 사립문까지 내려오고
산허리는 청단 홍단으로 물들었다.


잣나무가지 끝에는 청설모가 뛰어오르고
잘 익은 들깨알이 쏟아지고
가투 속에서 뛰쳐나온 콩알들이 땅바닥을 구른다.


생강나무 잎새는 함성처럼 노랗고
늙은 호박은 흰 분칠을 하고
붉게 익은 수수모가지는
호루라기소리처럼 쟁쟁하다.


만국기 펄럭이는 학교 운동장
새악시 옷소매 같은 가을이
서리 맞은 고추밭을 휘돌아
할매들의 귀밑머리를 스칠 때
이 산골에 눈부시게 스러져간 날들이 얼마였던가.


세월은 황소처럼 느리게 왔다가
여우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운동회가 파한 저녁답
굴뚝에 저녁연기 피어오르면
천지는 빈 밭처럼 쓸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