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사적 제199호
명 칭 : 서울 선릉과 정릉 (서울 宣陵과 靖陵)
분 류 :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면적 : 198813.19㎡
지정일 : 1970.05.26
소 재 지 : 서울 강남구 선릉로100길 1 (삼성동)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선릉관리소
자료참조 : 문화재청
△ 사적 제199호 - 서울 선릉과 정릉 (정릉) . 121113.
-정릉은 11대 중종의 무덤이다.
중종은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기위해 노력하였으나, 개혁파와 공신파의 정치적 논쟁이 끊이지 않아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정릉은 원래 중종 제1계비인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의 오른쪽 언덕에 있었으나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선릉의 석물제도를 본떴다. 조선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고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임진왜란 때는 선·정릉의 양릉이 훼손되는 변을 겪게 된다. 재실(齋室)은 양릉의 사이에 있으며, 여름철의 침수를 피하기 위해 층단에 지었는데 이러한 예는 선릉·정릉 뿐이다.
※(선릉·정릉 → 서울 선릉과 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정릉은 제11대 중종대왕(中宗大王)의 릉(陵)이다.
중종대왕(中宗大王)은 성종대왕(成宗大王)의 제2자(第2子)로서 성종(成宗) 19년(1488년) 3월 5일 탄생(誕生)하였으며 휘(諱)가 역(燡)이고 자(字)는 낙천(樂天)이며 모후(母后)는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이다. 성종(成宗) 25년(1494년) 4월 6일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封)하여졌으며 연산군 12년(燕山君 12年)(1506년) 9월 2일 연산군(燕山君)이 실덕 폐정(失德 弊政)으로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남에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의 명(命)에 따라 연산군(燕山君)은 폐위(廢位), 강화 교동(江華 喬洞)에 유배(流配)되고 경복궁 근정전(景福宮 勤政殿)에서 즉위(卽位)하였으니 춘추 19세(春秋 19歲)였다. 중종(中宗)은 연산주(燕山主)의 폐정(弊政)을 바로잡아 국정(國政)을 쇄신(刷新)하고 민생(民生)을 안정(安定)시키고자 반정공신(反正功臣)을 견제(牽制)하여 개혁(改革)의 실(實)을 얻고자 조광조(趙光祖)등 사림(士林)을 중용(重用)하였으나 신진사류(新進士類)의 개혁책(改革策)이 과격(過激), 급진(急進)하여 개혁파(改革派)와 공신파간(功臣派間)의 갈등(葛藤)이 심화(深化)되면서 중종(中宗) 14년(1519년) 위훈삭제(威勳削除)를 위요(圍繞)한 수구세력(守舊勢力)의 무참(誣讒)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신진사류(新進士類)가 피화(被禍)되고 이후(以後)로도 정쟁(政爭)이 끊이지 않아 조야(朝野)가 안정(安定)되지 못하였으며 삼남(三南)으론 삼포왜란(三浦倭亂) 등 왜관(倭冠)의 노략(鹵掠)이 우심(尤甚)하고 북방(北方)에 야인(野人)의 내침(來侵)이 잦아 비변사(備邊司)를 설치(設置)하였으나 실효(實效)를 거두지 못하였다. 중종(中宗) 11년(1516년)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設置)하여 많은 동활자(銅活字)가 주조(鑄造)되었으며 인쇄술(印刷術)의 발달(發達)로 많은 서적(書籍)이 편찬(編纂)되었으니 《사성통해》(四聲通解), 《속동문선》(續東文選),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與地勝覽) 등(等)이 간행(刊行)되었다.
중종(中宗) 39년(1544년) 11월 14일 환후(患候)로 왕세자(王世子)에 전위(傳位)하고 그 익일(翌日)인 15일 창경궁 환경전(昌慶宮 歡慶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재위 39년(在位 39年)이었고 춘추 57세(春秋 57歲)였다. 인종 원년(仁宗 元年)(1545년) 1월 5일 묘호(廟號)를 중종(中宗)이라 하였으며 릉호(陵號)를 희릉(禧陵)으로 하였으나 1월 24일 정릉(靖陵)으로 고치고 2월 3일 경기도 고양군 원당리(京畿道 高揚郡 元堂里)의 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中宗 第1繼妃 章敬王后 尹氏)의 희릉 우강(禧陵 右岡)에 장례(葬禮)지냈다. 7년 후(後)인 명종 17년(明宗 17年)(1562년) 중종(中宗)의 제2계비(第2繼妃)인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가 후일(後日)을 위하여 정릉기(靖陵基)가 불길지(不吉地)임을 내세워 봉은사 주지 보우(奉恩寺 住持 普雨)와 상의(相議)하고 선릉 동강(宣陵 東岡)이 길지(吉地)라 하여 천릉(遷陵)키로 함에 이 해 9월 4일 현 정릉기 건좌손향(現 靖陵基 乾坐巽向)(북동에서 남동향)(北東에서 南東向) 언덕에 천릉(遷陵)하였다.
릉침(陵寢)엔 병풍석 12면(屛風石 12面)을 세웠고 병풍석(屛風石)엔 와운문(渦雲紋)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象)을 새겼으며 그 밖으로 12간(間)의 난간석(欄干石)을 둘렀다. 양석(羊石)과 호석 각 2쌍(虎石 各 2雙)이 외향(外向)으로 교호 배치(交互 配置)되었고 릉전(陵前)에는 상석 1좌(床石 1座)가 있다. 그 양측(兩側)으로 망주석 1쌍(望柱石 1雙)이 있으며 3면(面)의 곡장(曲墻)이 둘러서 설치(設置)되었다. 한 단 아래 중계(中階)에는 문인석 1쌍(文人石 1雙), 마석 1쌍(馬石 1雙)과 중앙부(中央部)에 명등석 1좌(明燈石 1座)가 있다. 하계(下階)에는 무인석(武人石)과 마석 각 1쌍(馬石 各 1雙)이 있으며 릉상설 석물(陵象設 石物)이 선왕 성종(先王 成宗)의 선릉(宣陵)과 같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따르고 있다. 릉원(陵原)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비각(碑閣)은 정자각 동측(丁字閣 東側)에 있다. 비면(碑面)에 전서(篆書)로 조선국중종대왕정릉(朝鮮國中宗大王靖陵)이라 쓰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영조(英祖) 31년(1755년)에 세운 것이다. 정자각 남측 참도(丁字閣 南側 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紅箭門)이 있다.
경기도 고양(京畿道 高陽)의 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中宗 第1階妃 章敬王后 尹氏)의 희릉 영역(禧陵 塋域)에서 명종(明宗) 17년(1562년)에 현 정릉기(現 靖陵基)로 천봉(遷奉)하였으나 하절(夏節)엔 침수(浸水)로 보토(補土)에 누만거액(累萬巨額)이 소요(所要)됐고 재실(齋室) 또한 침수(浸水)로 보토(補土)했다. 이로 인(因)하여 후일 중종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後日 中宗 第2繼妃 文定王后 尹氏)의 봉릉시 비릉(封陵時 妃陵)을 정릉 영역(靖陵 塋域)에 조영(造營)치 못하고 경기도 양주 노원 불암산하(京畿道 楊州 盧原 佛巖山下)로 택정(擇定)하게 된다. 조선왕릉 중 대왕(朝鮮王陵 中 大王)만이 단릉(單陵)으로 봉릉(封陵)된 곳은 추봉(追封)된 단종(端宗)의 장릉(莊陵)을 제외(除外)하고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과 중종(中宗)의 정릉(靖陵)뿐이다. 그 뒤 선조대 임진왜란시 왜병(宣祖代 壬辰倭亂時 倭兵) 들이 선·정 양릉(宣·靖 兩陵)을 파훼(破毁)하는 흉변(凶變)을 겪게 되니 소위 이릉지변(所謂 二陵之變)이다.
재실(齋室)은 선릉(宣陵)과 정릉 중간지역 노변(靖陵 中間地域 路邊)에 있다. 재실(齋室)은 노면(路面)으로부터 2계(階)의 층단(層段) 위 최상단(最上段)에 있으니 이는 하절기 침수(夏節基 浸水)를 피(避)하여 상단(上段)에 건립(建立)된 것이며 층단(層段)을 두어 재실(齋室)이 축조(築造)된 곳은 이곳 선릉·정릉(宣陵·靖陵)뿐이다.
선릉·정릉(宣陵·靖陵)의 주산(主山)이라 할 배산(背山)은 산세(山勢)가 낮고 완만(緩慢)하며 좌우(左右)의 호위산세(護圍山勢) 또한 같은 구릉성 임야지(丘陵性 林野地)로서 동편(東便)에는 정릉(靖陵)이 서편(西便)에는 선릉(宣陵)이 있는 바 릉경역(陵境域)은 일반인(一般人)의 출입(出入)과 개전(開田)을 금(禁)하는 지역(地域)임에도 일정시 조선총독부(日政時 朝鮮總督府)는 식량증산 명목(食糧增産 名目)아래 저지대 개간(低地帶 開墾)을 허가(許可)하고 심지어는 양릉(兩陵) 사이 구릉 저지(丘陵 低地)까지 개전(開田)이 허가(許可)되어 릉림(陵林)이 제벌(除伐)되고 개전(開田)되면서 일부 농지(一部 農地)는 릉침(陵寢)보다 북측 상위(北側 上位)까지 미치게 되는 참담(慘憺)한 지경에 이른다. 8·15광복(光復)을 거쳐 6·25전란 후 인근 농민(戰亂 後 隣近 農民)에 의한 개간(開墾)은 계속(繼續)되어 릉침 부근(陵寢 附近)까지 개전(開田)된데다가 1950년도 농지개혁법(農地改革法)에 의하여 농지(農地)는 경작자(耕作者)에게 분배처분(分配處分)되면서 릉역내(陵域內)에서 사유농지(私有農地)가 생기게 된다. 1960년대 서울의 급격(急激)한 비대확장(肥大擴張)으로 인구(人口)의 분산(分散), 주택용지 해결(住宅用地 解決)을 위하여 서울시는 한강 이남(漢江 以南)의 강남지역(江南地域)을 개발(開發)하게 되고 토지구획정리사업(土地區劃整理事業)을 1970년대부터 시행(施行)하면서 선·정릉(宣·靖陵) 동·서·북(東·西·北)의 릉지(陵地)는 택지(宅地)로 변모(變貌)되고 릉침(陵寢)이 간선도로(幹線道路)와 접면(接面)하는 등 현재(現在)의 선·정릉(宣·靖陵) 경역(境域)이 이루어졌으니 도회지(都會地) 속의 고도(孤島)와 같다. 도시계획사업(都市計劃事業)을 주관 시행(主管 施行)한 서울시나 관계당국(關係當局)의 천견단려(淺見短慮)가 아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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