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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조선왕릉 - 여주 영녕릉 -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나무향(그린) 2007. 1. 22. 21:28

종 목 : 사적 제195호

명 칭 :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驪州 英陵과 寧陵)

분 류 :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면적 : 2,008,536㎡

지정일 : 1970.05.26

소 재 지 : 경기 여주군 능서면 영릉로 269-50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세종대왕유적관리소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 문인석1

▲ 문인석2

△ 사적 제195호 - 여주 영릉(英陵)

 

-영릉(英陵)은 조선 4대 세종(재위 1418∼1450)과 부인 소헌왕후 심씨(1395∼1446)의 무덤이다.

세종은 정치·경제·사회·역사·문화 등 각 분야에서 조선시대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한 왕이다.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가 죽자 헌릉 서쪽 산줄기에 쌍실 무덤인 영릉을 만들었다. 동쪽 방은 왕후의 무덤으로 삼고, 서쪽 방은 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한 무덤으로 문종 즉위년(1450)에 왕이 죽자 합장하였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서로 다른 방을 갖추고 있는 합장무덤을 하고 있다.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무덤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세조 이후 영릉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무덤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옮기지 못하다가 예종 1년(1469)에 여주로 옮겼다.

무덤의 주변에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무덤을 옮길 때 전에 있던 석물인 상석, 명등석, 망주석, 신도비들은 그 자리에 묻었으며, 훈민문·세종대왕동상·세종전 등은 1977년 영릉정화사업 때 세운 것이다.

※(영릉·녕릉 →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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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 사적 제195호

명 칭 :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驪州 英陵과 寧陵)

분 류 :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면적 : 2,008,536㎡

지정일 : 1970.05.26

소 재 지 : 경기 여주군 능서면 영릉로 269-50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세종대왕유적관리소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 사적 제195호 -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영릉(寧陵) 효종대왕과 인선왕후 ). 121120.

 

-영릉(寧陵)은 17대 효종(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1618∼1674)의 무덤이다.

처음엔 건원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현종 14년(1673)에 여주 영릉 동쪽으로 옮겼다. 영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동원상하릉으로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고, 경종의 무덤인 의릉이 이런 형태를 하고 있다.

조선왕조 왕의 무덤배치에 하나의 전환기가 된 형태로 무덤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고, 돌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돌에 문자를 새겼다. 즉 세조의 유언에 따라 병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이 선릉 때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석을 설치하면서 다시 시작되었지만, 영릉에서 다시 사라졌다. 무덤 앞에는 상석·문인석·망주석 등의 석물이 있으며,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있다.

※(영릉·녕릉 →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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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95호. 조선왕조 제4대 임금인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 심씨(沈氏)의 능.

 

원래 영릉은 소헌왕후가 죽은 1446년(세종 28) 광주(廣州) 헌릉 서쪽에 조성하여 그 우실(右室)을 왕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가 1450년 왕이 죽자 합장했다. 이 능은 〈국조오례의 國祖五禮儀〉 치장조(治葬條)를 따른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능의 석물(石物)은 병석(屛石)에서 영저(靈杵)·영탁(靈鐸)·지초문양(芝草紋樣)을 배제하고 구름문양과 12지신상만 조각해 조선병석문(朝鮮屛石紋)의 기본을 확정했으며, 혼유석(魂遊石)의 고석(鼓石)을 5개에서 4개로 줄이는 등 제도상 고친 것이 약간 있었다. 세조 때 이 영릉이 불길하다는 의논이 대두했으나 서거정(徐居正)이 "천장(遷葬)함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자가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고 반대하여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 여주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는 세조의 유언으로 병석과 석실의 제도를 폐지하고 회격(灰隔)으로 합장했다. 능 앞에 혼유석 2좌를 놓아 양위(兩位)임을 표시했을 뿐 상설제도는 단릉(單陵)과 같다. 광릉(光陵)에는 동자석주(童子石柱)에 12지신상을 표시했는데 이보다 1년 후에 천릉한 영릉에서는 12지(支)를 문자로 기록했고, 그 이후에는 난간에 24방위까지 넣은 새로운 왕릉상설제도를 이루었다. 광주에 세워졌던 신도비(神道碑)는 능을 옮길 때 땅에 묻었던 것을 1974년에 발굴해 세종대왕기념관 앞뜰에 옮겨놓았다.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은 대한민국 사적 제195호로, 조선 제4대 세종과 그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능인 영릉(英陵)과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능인 영릉(寧陵)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두 개의 왕릉은 700m 거리를 두고 있는데, 이를 잇는 오솔길은 짧지만 조붓한 흙길이라 정감이 있고, 숲이 아늑하고 한산해 걷기 좋다. 5월 중순부터 10월초까지만 산책로로 개방한다. 약간의 오르막과 약간의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이라 가볍게 걸을 만하고, 이리 휘고 저리 돌며 길이 이어져 있다